“기업에서 얻은 이익,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유일한 박사의 기업 경영의 제1원칙, 투명경영·성실납세 평소 검소한 생활과 거액의 기부, 가치투자의 귀재 등으로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워렌버핏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요즘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화두이다. 하지만 이를 40여년 전 몸소 실천하신 분이 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기업활동이 사회적 기여 활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돌아가신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그의 어록에서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숭고한 정신과 전무후무한 기업이익의 사회공헌 시스템 구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유일한의 사회적 업적이다.▲ 유한양행의 사회 환원 시스템.>“기업의 존립 바탕인 국가에 성실하게 납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치와 기업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투명한 경영을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유한양행의 기업이미지에 또 하나의 큰 보탬을 준 셈이다.유일한이 평생 기업가로서 펼쳐온 국익 사상, 혁신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실용주의, 낭비를 절대 허용치 않는 근검절약의 정신과 청지기 정신은 한국 사회 기업사의 보기드문 모범이 되고 있다.유일한에게 기업활동은 그 자체가 교육사업이며, 공익사업이었다. 귀국 후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장학, 공익사업은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든 195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유일한은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하고 1960년대에는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항구적인 교육장학, 사회원조사업을 위해 유한양행 주식 등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 1970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현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을 발족하였으며 유언장을 통해 전재산을 이 기금에 기증했다.생전에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보다 교육사업가로서 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유일한 박사가 외국 출장 시에도 ‘유한양행 회장’ 명함보다는 ‘Educator’라 씌여있는 명함을 즐겨 사용했다는 일화만 보더라도 교육에 대한 그의 애정과 태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기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진짜 기술인을 좋아했던 유일한이 기술 전문학교인 유한공고를 세운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를 세울 때부터 탁상공론을 철저히 배격했다. 일하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갖고 있는 교육관이었다. 따라서 초창기 교육과정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실습을 대폭 강화했다.유일한은 생전에 시간만 있으면 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젊은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했으며, 격의없이 어린 학생들을 안아 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쉬는 시간이나 운동장에서 격식 없이 잠깐씩 만났으며, 학생들에게 하는 말도 늘 같았다. “너희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 나라가 발전한다.” 신임교사들에게 했던 당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이끌 훌륭한 인재를 키워 달라.”는 당부를 항상 잊지 않았다고 한다.유일한은 독립운동가이다. 하지만 그를 독립운동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부터 조국 현실에 눈뜨고 14살에 조국 독립을 위한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 자원 입대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1919년 24살의 대학생이던 유일한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한인자유대회에서 한인대표로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는 등 기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민족기업으로 성장시킨 후, 유일한은 1938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전개한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에 가담하였고, 이후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활발한 애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1942년에는 LA에서 재미 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에는 버지니아주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이는 IPR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생전 그의 침묵으로 유박사의 독립운동은 사후에야 비로소 연구가들에 의해 알려졌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 중 정점이라 할 만한 것은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임한 냅코(NAPKO) 작전이다. 유박사는 1942년부터 미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OSS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작전에 공작원으로 입대하게 된다. 이 작전은 한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과 합동 수행으로 한국인을 국내로 침투시켜 정보 수집, 폭파, 무장 유격활동 등을 전개하는 것이었다.당시 유박사는 5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된 군사훈련과 공수훈련까지 받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45년 8. 15 광복으로 냅코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한 그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유일한 박사는 교육장학 사업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공헌하였다. 그 예로,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 사우공제회, 보건장학회, 유공관리기금 등을 설립하였고 1970년에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설립함으로써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원조사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였다. 이 기관은 1977년 법률규정에 따라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각종 공익사업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유일한 박사는 기관 설립 이듬해인 1971년 타계할 당시 개인소유주식 14만941주(발행주식 수의 20.6%) 모두를 이 기관에 기부하여 현재 유한재단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1년 3월 11일 영면 시까지 유일한이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현재가치 약8,850억원-2014년 2월 기준 시가총액 2조 2,137억원)에 달한다.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해 온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철학의 완성작으로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며 많은 기업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