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 편에 걸쳐 우리는 같은 성벽을 저마다 다른 망치로 부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성남 장학사는 ‘함께 키우면 달라진다’라는 증거로 인식의 벽을 두드렸고, 김성민 대표는 ‘연결되면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구조로 제도의 벽을 허물었으며, 최은진은 자신이 통과한 상실을 현장의 전문성으로 바꾸어 후배들의 두려움을 덜어 주었다.
한 사람은 마음의 언어로, 한 사람은 일자리의 언어로, 한 사람은 돌봄의 언어로 같은 진실에 도달했다.
이번에 만날 서연지는, 그 벽의 또 다른 면을 마주한 청년이다.
그가 부딪힌 편견은 ‘부모 없이 자란 아이’를 향한 통념만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야 시설에 들어왔다는 사실, 곧 ‘늦게 보호받기 시작한 아이’라는 또 하나의 시선이 그의 출발선 위에 겹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선을 말로 반박하지 않았다. 매일의 노동과 한 장의 자격증, 그리고 한 통의 112 신고로 천천히 지워 나갔다.
늦게 들어온 아이라는 시선
서연지는 어린 시절부터 시설에서 자란 경우가 아니라,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 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된 청년이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시설 생활은 쉽지 않았다. 보호시설은 안전한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작은 사회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 적응하고,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은 그에게 적지 않은 과제였다.
‘시설 출신’이라는 한 단어 안에도 사회는 또 한 겹의 잣대를 들이댄다.
늦게 들어온 아이일수록 사연이 복잡할 것이고, 그만큼 더 불안정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상처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시설에서 만난 어른들, 마음을 나눠 준 사람들, 자신을 지켜봐 준 이들의 존재는 그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데 힘이 되었다.
쉽지 않았던 보호시설의 시간은, 훗날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울타리를 떠난 자리에서
2021년, 서연지는 보육원을 퇴소하며 본격적인 자립의 길에 들어섰다. 보호의 울타리를 떠나 사회로 나온 순간, 그가 먼저 마주한 것은 자유보다 외로움이었다.
시설 안에서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지만, 퇴소 이후의 현실은 조용했고 막막했다. ‘이제 정말 혼자구나’라는 감각은, 자립 초기의 많은 청년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깊은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그 외로움 속에서 무너지기보다 다른 질문을 품었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분명히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 사람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이 마음은 그가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 되었다.
말 대신 노동으로 지워 낸 통념
서연지는 남서울대학교 스포츠건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목표는 장애인스포츠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단순히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생활체육을 전하고 그들의 일상에 활력을 더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려면 현실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장애인을 직접 찾아가는 생활체육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는 차량이 있어야 했다. 자립준비청년에게 차량을 마련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목표가 아니다.
그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쿠팡 물류센터, 특수체육 강사, 음식점 서빙 등 여러 일을 동시에 감당했다. 한 주에 서너 개의 일을 병행한 시기도 있었다. 지치고 그만두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렇게 2~3년의 시간을 보낸 끝에 2023년, 그는 대출 없이 차량을 마련했고 장애인스포츠지도자 자격증도 취득했다. ‘시설 출신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기댈 곳이 없으니 쉽게 무너진다’는 통념은, 그의 이 몇 해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그가 통념을 반박한 방식은 항변이 아니라 출근이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태도 역시 단순하다. “하면 된다. 안 되면 안 한 것이다.” 그에게 이 말은 구호가 아니라 실제 삶의 방식이었다.
끝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고, 안 되면 방법을 바꾸었으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섰다.
기록으로 남은 시간들
그의 활동은 학업과 취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2020년 남서울대학교 스포츠건강관리학과 우수 멘토링 상장을 받았고, 2021년에는 소외계층 봉사활동으로 표창을 받았다.
2022년에는 학과 공로상과 봉사상을 받으며 학교 안팎의 활동을 인정받았다. 2023년부터는 제14기 바람개비 서포터즈로, 2024년부터는 충청남도 이어유 서포터즈와 보호연장아동 멘토링·강연으로 활동을 이어 갔다.
현재 서연지는 아산시장애인체육회에서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오래 품어 온 장애인 체육 분야 안에서 직업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 자리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오래 준비해 온 꿈과 직접 연결된 삶의 자리이기도 하다.
‘부모의 울타리가 없으면 안정된 자리에 닿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편견 역시, 그렇게 한 사람의 출근 도장으로 조용히 반증되고 있다.
‘무책임할 것’이라는 편견 앞에서
대중문화가 오래 반복해 온 도식 가운데 하나는, 돌아갈 가정이 없는 사람은 책임감도 옅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서연지의 한 장면은 그 도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아산시 음봉면 덕지리 부근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그는 앞 차량 트렁크 문 사이에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납치나 감금 같은 강력범죄 가능성을 떠올린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즉시 112에 신고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트렁크 안에 갇혀 있다면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차량 사진을 촬영해 경찰에 전달했고, 정확한 정보 덕분에 경찰은 차량을 신속히 특정해 출동할 수 있었다.
확인 결과 트렁크에 넣어 둔 가발이 문에 끼인 해프닝으로 밝혀졌지만, 경찰은 시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제보가 협력 치안에 기여했다며 그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큰 사건은 아니었으나,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먼저 움직였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시설 출신은 무책임할 것’이라는 편견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짧고 분명하게 보여 준다.
자립을 개인의 성공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것
서연지가 눈에 띄는 지점은, 자신의 자립을 개인의 성취로만 마무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외로움과 막막함을 알기에, 후배 자립준비청년과 보호아동을 위한 멘토링과 강연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누군가가 위로를 얻는 모습을 볼 때, 과거의 자신에게도 손을 내미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은 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이 되었다.
2025년, 그는 한국고아사랑협회가 주최한 ‘올해의 자립준비청년상’에서 자립준비청년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 상은 단지 어려운 환경을 견뎌 낸 청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세우고, 다시 후배들에게 손을 내밀며, 지역사회 안에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청년에게 주어진 상이다.
수상소감에서 그는 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계기로 더 나아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의 말처럼 이 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에 가깝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부순 자리
이성남 장학사가 ‘고아였으니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는 통념을 교단에서 지웠고, 김성민 대표가 그 통념을 제도와 일자리로 무너뜨렸으며, 최은진이 상실의 경험을 전문성으로 되갚았다면, 서연지는 ‘늦게 들어온 아이’, ‘기댈 곳 없는 청년’, ‘무책임할 사람’이라는 겹겹의 편견을 말이 아니라 삶 자체로 지워 냈다.
그가 부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매일의 출근과 한 번의 신고, 그리고 후배들 앞에 선 한 번의 강연 같은 평범한 장면들이었다. 편견은 결코 한 번의 선언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자기 삶 전체를 망치 삼아 한 장면씩 부수어 갈 때, 성벽에는 분명히 금이 간다. 그리고 그 금 사이로, 다음 아이가 통과할 길이 열린다.
서연지가 부순 자리에도 그렇게 길 하나가 났다. 그가 그러했듯, 그 길을 통과한 다음 청년이 또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립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가장 단단한 벽인 편견을, 끝끝내 부수는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할 단 하나의 태도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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